CHRISTIAN WORLDVIEW SERIES

[시리즈] 54. 왕좌를 차지한 기업, 로스차일드 가문

PhilKimm 2020. 5. 19. 16:42

▴ 로스차일드 가계도/ 출처: 위키피디아

 

"금권(화폐) 권력은 평화시에 국가를 잡아먹으려 하고 역경의 시기에는 반역을 꾀한다. 그것은 군주제보다 더 포학하고, 독재보다 더 거만하며, 관료제보다 더 이기적이다. 나는 가까운 미래에 나를 무력하게 하고 내 조국의 위험 앞에 떨게 하는 위기가 닥쳐올 것을 알고 있다. 기업이 왕좌를 차지했다. 타락의 시대가 뒤따를 것이고, 재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고, 공화국이 파괴될 때까지 금권(화폐) 권력은 대중에게 피해를 끼치며 그 권세를 확장할 것이다. "

- 에이브러험 링컨(미국 대통령, 1809.2.12~1865.4.15)

 

전세계 금융시장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한 소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19세기, 로스차일드 가문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금융 가문입니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RB)의 전신인 미국 중앙은행에서 전체 지분 중 70%를 차지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잉글랜드 은행의 설립자였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막대한 지분을 보유했고, 즉 이들 가문이 미국의 중앙은행을 소유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1811년 미국 국회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누리는 특권을 반대했고, 이 사실을 인지한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미국 국회가 로스차일드 가문에 특별 권한을 지속 부여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했습니다.

 

1812년, 영국은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의 지원아래 미국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로스차일드의 계획은 영국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었으며, 미국이 이번 전쟁을 통해 많은 빚을 지게 하여, 로스차일드 가문 은행의 특허권을 연장할 수밖에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계획은 성공하게 됩니다. 1816년, 미국의 두 번째 은행이 설립되고, 20년의 특허권을 얻게 됩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수천 명의 영국과 미국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계획대로 그들의 은행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사업은 오직 가문의 남성만이 맡을 수 있다는 유서를 남기고 사망했습니다. 로스차일드가는 오직 사촌 간의 통혼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가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어가며, 가문의 재산을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로스차일드 자녀들의 18차례의 결혼 중, 16차례는 모두 사촌간에 이뤄진 결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로스차일드 가문의 정확한 재산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 나폴레옹 전쟁 (1803-1815)

 

실제로, 1812년에 벌어진 미영전쟁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부를 확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서도 이익을 거두었습니다.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잉글랜드 은행을 통해서 웰링턴 공(Wellington)을 지원했고, 네이선의 형제 제임스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프랑스 중앙은행을 설립 후, 나폴레옹을 지원하게 됩니다. 이 전쟁은 다시 한번 로스차일드 가문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습니다. 전쟁 기간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는 완벽한 통신 시스템을 구축하고, 정보원들을 통해서 상황의 변화를 보고받고, 그 정보를 이용하여 주식시작을 조작했습니다. 정보원들은 웰링턴 공이 워털루 전쟁의 결과를 보고받기 전에 먼저 네이선 로스차일드에게 더욱 빨리 보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이미 갖추었던 것입니다. 워털루 전쟁과 관련된 내용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 워털루 전쟁 (1803년 5월 18일 - 1815년 7월 8일)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영국군과 프랑스 군대가 대격돌하였는데, 이 전투에 따라 차후 유럽의 판도가 갈릴 확률이 매우 높았고, 유럽의 이목은 모두 이 곳으로 쏠려 있었다. 만약 영국이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영국의 명예와 권위는 그 어느때보다도 높아질 것이지만, 만약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긴다면 영국이 무너지며 그와 함께 영국과 관련된 채권, 무역 문서, 신용도가 폭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도 이 전투의 행방에 크게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누구보다도 빨리 이 전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뛰어난 정보 수집망을 바탕으로 정부보다 무려 1일이나 앞선 날에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이 이겼다는 소식을 입수했다. 하지만 그는 이 귀중한 정보를 대중들에게 곧이곧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향해 영국군이 졌다라고 거짓 정보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이 말을 믿은 금융가의 사람들은 곧 그 가치가 폭락할 영국의 국채를 팔아치우기 시작했고, 워낙 많은 수의 국채가 한꺼번에 매물로 나왔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 영국의 국채는 이전의 5%밖에 안 되는 헐값이 되어버렸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헐값에 나온 영국의 국채를 모두 사들였고, 그 다음날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전보를 전하면서 영국 국채 가격은 엄청나게 치솟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행동으로 인해 로스차일드 가문은 무려 20배나 되는 차익을 보았고,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나중에 세계적인 금융 제국을 세우는 데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 위키피디아, '로스차일드가 내용 중 발췌'

 

"나는 어떤 군주가 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지배하는지 신경쓰지 않는다. 영국의 통화를 지배하는 자가 대영제국을 지배하는 것이고, 나는 영국의 통화를 지배한다"

- 네이슨 로스차일드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의 세력은 매우 강력했고, 그들은 영국 은행을 통제하면서 전세계 금융 시스템을 바꿔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서도 헤겔의 변증법 원리에서 제시된 '통합'을 통해 이뤄진 것입니다. 1814년,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서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비엔나회의(Congress of Vienna)가 개최되었습니다. 비엔나는 솔로몬 로스차일드가 유명세를 떨치던 곳이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양측 입장을 통합하여 문제를 해결했고, 이는 1차 대전 이후의 국제연맹, 2차 대전 이후의 연합국 설립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1814년 비엔나회의는 세계 정부를 세우는 청사진을 갖은 최초의 회의였습니다.

 

▴비엔나회의

 

1817년, 프랑스는 전쟁 후, 거액을 대출받아 국가를 재건합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브로커는 프랑스 정부의 채권을 대량으로 매입하여 채권의 가치는 고공 행진하게 됩니다. 1818년 11월 5일, 공개시장에서 채권 전부를 매도하여 채권의 가격을 폭락시켰고, 프랑스는 금융 공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이 기회를 틈타, 로스차일드 가문이 개입하여 프랑스에 화폐를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1812년, 칼 메이어 로스차일드가 이탈리아와 바티칸으로 파견되어 로마 교황과 거래를 하고, 1823년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로마 천주교의 글로벌 금융 업무를 관리하게 됩니다.

 

1827년, 월터 스콧 경(Sir Walter Scott)은 나폴레옹의 일생에 대한 작품을 남겼는데, 그는 제 2부에서(총 9부) 프랑스혁명은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가 계획한 것이며, 유럽 환전상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서 유럽 환전상은 로스차일드 가문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1832년, 미국 7번째 대통령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의 연임을 위한 경선에서 그의 구호는 바로 "잭슨 그리고 은행의 퇴출!(Jackson and No Bank!)"이었고, 유명한 발언으로 “그 은행이 날 죽이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없앨 것이다.(the bank is trying to kill me, but I will kill it)"가 있습니다. 그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중앙은행에서 금융시스템 통제권을 회수해오겠다는 의지를 내비쳤고, 국민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금융 시스템을 세우기 원하는 이 담겨있었습니다. 또한, 주마다의 독자재정을 박탈함과 함께 서민의 이익에 따르지 않는 것이라며 이를 적대시하여,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폐지를 위해 힘썼습니다. 1년 후, 그는 공약을 실천하며, 로스차일드 가문의 은행에서 모든 예금을 회수했습니다. 이 사건은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으며, 가문은 미국의 화폐공급량을 축소할 것을 명령하며, 디플레이션을 야기합니다. 잭슨은 이 상황의 전말을 알아차리고,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너희들은 강도와 독사와 같다. 내가 너희들을 처참히 짓밟아 주겠다. 영원하시 하나님께 맹세하노니, 너희들을 밟아주겠다."

 

1835년 1월 30일, 잭슨 대통령은 사상 최초로 암살의 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건 발생 후, 잭슨 대통령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번 암살의 배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발표합니다. 그 뒤, 암살자로 고용된 리처드 로렌스(Richard Lawrence)는 유럽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가문에서 그를 고용했으며, 만약에 체포되어도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것을 약속했다고 밝혔습니다. 정말로, 법원은 그를 정신 이상자로 판결하고, 형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 잭슨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는 리처드 로렌스

 

1836년, 결국 은행가와의 싸움에서 잭슨 대통령은 승리했고, 제2 연방은행은 연방의 보증을 잃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며, 그 뒤에도 잭슨의 여러가지 정책에 의해 파산에 내몰리게 됩니다.

 

1841년, 존 타일러(John Tyler) 대통령은 미국 중앙은행의 특허권을 다시 되살리는 결의안을 부결시키고, 수 백 차례에 달하는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게 됩니다.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당시의 네이선 로스차일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는 세계 금융 시장의 제왕이며, 명실상부한 모든 사물의 패권자이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를 담보로 수입을 얻고 있다. 세계 각국의 군주들과 총리들은 그의 제안을 듣길 원하고, 지도를 받길 원한다." "진실로 이 세계를 통치하는 사람은, 세계 무대 앞에 서있는 사람과 결코 동일한 무리들이 아니다."

 

1845년, 잭슨 대통령이 숨을 거두기 전, 그가 이룬 가장 위대한 업적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내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은행을 없앤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1846년, 메이어 암솀 로스차일드 부인은 임종 전에 "만약에 내 아들들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1850년, 프랑스의 제임스 로스차일드 가문은 6억 프랑을 소유했다고 합니다. 이 규모는 기타 프랑스 은행가들의 재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 1.5억 프랑이나 많은 것입니다.

 

1861년, 미국 제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정부 독자적으로 전쟁비용 조달을 위해 화폐를 발행했습니다. 그리고, 민간과 공공을 위한 채권 입찰은 모두 합법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두 번째 해, 미국은 총 4억 5천 달러를 발행합니다. 이 화폐의 뒷면이 녹색이기 때문에 '링컨의 그린백'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링컨은 "우리는 전무후무했던 이익을 사람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지폐를 가지고 모든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1865 년, 링컨은 금융가들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나에게는 2개의 최대의 적이 있다. 앞에는 남부군과 뒤로는 금융 기구가 있다. 이 2개의 적들 중 나에게 가장 큰 적은 바로 뒤에 있는 적이다." 결국, 링컨은 그 해에 암살 당했습니다.

 

제이콥 쉬프(Jacob Schiff, 로스차일드 가문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남)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런던 은행에서 단기훈련을 받고, 미국으로 파견됐습니다. 그는 미국 중앙은행의 통제권을 앗아간 미국을 지배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졌고, 이 일에 적합한 후보자들 찾아서 미국 연방정부의 고위직에 보내야 했습니다.

 

1875년, 제이콥 쉬프는 미국의 주요 은행을 장악했고, 미국의 기타 주요 은행가들과 결속을 맺었습니다.

 

1881년, 미국 제20대 대통령 재임스 가필드(James A. Garfield)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 시장을 지배한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우리나라의 화폐를 지배하는 사람은 실제로 모든 공업과 비즈니스의 시스템을 통제하는 것과 같다. 만약, 당신이 전체 시스템이 모 권위 있는 사람의 손에 놀아난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 인플레이션 주기와 불황의 주기가 왜 출현하게 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1891년, 영국 노동당 지도자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이 피를 빨아먹는 가문은 당대 유럽이 겪은 모든 고통의 발단이다. 그들은 본래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국가들을 이간질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통해 놀라울만한 재력을 얻었다."라고 비난했습니다.

 

"유럽이 위기를 겪고, 전쟁이 일어난다는 유언비어가 돌며, 사람들이 혁명과 재난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면, 이 소란 뒤에는 반드시 로스차일드 가문의 그림자가 존재할 것이다."

 

결과적으론 역사에서 등장한 크고 작은 사건들마다 그 배후에는 경제를 장악한 가문과 세력의 은밀한 거래가 존재했고, 지금도 앞으로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 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로스차일드가과 유대인의 관계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